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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황후 (동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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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황후는 오나라 손권의 황후로, 하급 관리의 딸로 태어나 궁궐의 직조실에서 일하다 손권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었다. 빼어난 미모로 총애를 받았으며, 손권의 막내 아들 손량을 낳고 황후로 책봉되었다. 252년 손권의 병환 중 궁인들에게 살해되었으며, 그녀의 죽음에 연루된 이들이 처형되었다. 반황후는 불교에 관심을 갖고 사찰 건립에 기여했으며, 후세에 석류꽃의 신으로 숭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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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황후 (동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판 부인, 우요루 그림
판 부인, 우요루 그림
이름판숙
로마자 표기Pan Shu
출생지닝보, 저장 성
사망지난징, 장쑤 성
사망일252년 2월 또는 3월
매장지자금산, 난징, 장쑤 성
배우자 및 자녀
배우자손권
자녀손량
작위 정보
작위동오의 황후
재위 시작251년 6월 또는 7월
재위 종료252년 2월 또는 3월
전임자대의왕후 왕씨
후임자전황후
기타 정보
사인궁궐 내에서 갑작스럽게 사망
입후 전 신분
입후 전 신분부인

2. 생애

손권의 병수발을 드느라 자신도 수척해졌는데, 이때를 틈탄 궁인들에게 목이 졸려 죽었다.[25]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된 자가 예닐곱 명이었다.[25] 신봉 원년 (252년) 2월, 내궁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혼수상태에서 궁녀들에 의해 교살되었고, 급병으로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다.[2] 후에 사건이 드러나, 이 사건과 관련된 6, 7명이 사형에 처해졌다.[2]

252년 손권(孫權)이 중병에 걸리자 반황후는 여후가 남편 (고조)의 죽음 이후 한나라를 어떻게 다스렸는지에 대해 손홍(孫弘)에게 물었다.[10] 손권 곁을 계속 간호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아 그녀 또한 병에 걸렸다. 결국 그녀는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살해당했다.[10]

오나라 관료들은 그녀의 시녀들이 잠든 그녀를 목 졸라 죽였고, 그녀의 죽음은 자연사라고 주장했다.[10] 반황후가 살해된 이유는 《삼국지》에 언급되지 않아 논란으로 남아있다.[10] 《건강실록》에는 시녀들이 중병에 걸린 황제와 황후를 모두 돌보는 것을 꺼려 황후를 살해하여 짐을 덜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0] 또한, 《자치통감》에는 반황후가 시녀들을 학대하여 살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1] 하지만 《자치통감》의 주석가인 호삼성을 포함한 많은 역사가들은 이 주장이 근거가 없으며, 원문의 오해라고 지적했다.[11] 그는 또한 오나라 고위 관료들이 공모했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손권의 죽음 이후 그녀가 태후가 되어 권력을 장악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11]

그녀의 죽음에 대한 조사 결과 6~7명이 처형되었다.[12] 반황후가 죽자 신하들은 슬퍼하며 그녀를 위한 기도 의식을 거행했다.[12] 손권은 같은 해 곧 사망했다. 반황후는 손권과 함께 장릉(蔣陵; 남경 자금산, 장쑤성)에 묻혔다.[13] 그로부터 2개월 후 손권도 붕어했고, 장릉에 합장되었다.[2]

2. 1. 초기 생애

반황후는 회계군 구장현(현재의 닝보시) 출신이다.[2] 하급 관리였던 아버지[2]는 죄를 지어 처형당했다.[24][2] 자세한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2] 반황후는 노비가 되어 왕실 방직 공장에 배속되었다.[2] 이후, 아버지가 법을 어겨 처형당해 언니와 함께 연좌되어 노비로 떨어져 직실(織室)로 보내졌다.[2]

그 미모는 손권에게 발탁되어, 직실에서 불려 나가 후궁에 들어가 총애를 받게 되었다.[2] 적오 5년 (242년)에 왕부인과 손화 모자의 지위가 확립되자 많은 후궁들이 후궁에서 물러났지만, 그녀는 후궁을 떠나지 않았다. 적오 7년 (244년), 내전에서 손량(후의 폐제)을 낳았다.[2] 임신했을 때 누군가가 용의 머리를 자신에게 주어 그녀 스스로가 그것을 받았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2] 모자 모두 황제에게 사랑받았다. 손권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적오 13년 (250년) 11월에 손량을 황태자로 삼았다.[2]

태원 원년 (251년) 5월, 황후로 책봉되었다.[2] 손권은 처음에는 후궁을 황후로 삼을 의사가 없었다고 하며, 선임 황태자의 어머니인 왕부인을 포함한 후궁들이 황후로 승격되는 것에 대해서도 거부적인 태도를 보였다.[20] 반숙은 생전에 유일하게 황후가 된 후궁이다.[20] 입후라는 경사를 위해 태원으로 개원하고, 대사면을 실시했다.[2]

생전에 정치에 대한 개입은 없었지만,[2] 어린 황제의 즉위 후 정치를 집행하려는 의향이 엿보인다. 한 번은 전한여후고조 사후에 칭제한 경위를, 사람을 보내 손홍에게 질문했다는 기록이 있다.[2]

2. 2. 손권과의 만남

반황후는 하급 관리의 딸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죄를 지어 사형당한 후 언니와 함께 궁궐 직조실에서 일하게 되었다.[24] 뛰어난 미모 덕분에 손권의 눈에 띄어 후궁으로 들어갔고, 손권의 총애를 받았다.[24] 특히 강남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알려져, 손권은 화가를 시켜 초상화를 그리게 할 정도였다.[4] 역사서 《습유기》에는 손권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과연 여신이로다. 그녀의 슬픔조차 이토록 매력적인데, 미소를 짓는다면 더 말해 무엇하리."라고 외쳤다는 기록이 있다.[4]

손권의 막내아들 손량을 낳았으며, 임신 중에는 용의 머리를 받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24] 아들 손량은 적오 13년(250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고,[24], 반황후는 태원 원년(251년)에 황후가 되었다.[25] 손권은 반씨를 황후로 세우면서, 입후를 기념하기 위해 연호를 태원으로 바꾸고 대사면을 실시했다.[25]

반황후는 생전에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으나, 중서령 손홍에게 전한고황후가 전한 고조 사후 정권을 잡은 사례를 알아보게 하는 등 정치에 관심을 보였다.[24][25]

2. 3. 황후 책봉

반황후는 하급 관리의 딸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죄를 지어 사형당한 후 언니와 함께 궁궐 직조실에서 일하게 되었다.[24] 뛰어난 미모 덕분에 손권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었고, 총애를 받았다.[24] 특히 손권이 여행을 갈 때에도 동행할 수 있었으며, 조현 정자에서 술을 마시다 루비 반지를 떨어뜨린 일화와 낚시를 하면서 훗날의 근심을 예견한 일화는 반황후의 총명함과 손권의 각별한 애정을 보여준다.[7]

손권의 셋째 아들 손화가 242년에 태자가 되었을 때, 손권은 왕부인을 존경하여 다른 후궁들을 내쫓았으나 반황후는 예외였다.[6] 243년, 반황후는 용의 머리를 받는 꿈을 꾸고 손량을 낳았다.[24] 250년, 손권은 손화손패 사이의 후계 다툼 끝에 손량을 태자로 삼았다.[24]

251년, 손권은 반씨를 황후로 책봉했는데, 이는 손권이 후궁을 황후로 삼지 않겠다던 이전의 선언을 번복한 이례적인 일이었다.[8] 반황후 책봉을 기념하여 사면령이 내려지고 새로운 연호가 사용되었다.[9] 반황후는 생전에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지만, 중서령 손홍에게 전한고황후가 전한 고조 사후 정권을 잡은 사례를 알아보게 하는 등 정치에 관심을 보였다.[25]

2. 4. 죽음

반황후는 손권의 병수발을 드느라 자신도 수척해졌는데, 이때를 틈탄 궁인들에게 목이 졸려 죽었다.[25] 이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된 자가 예닐곱 명이었다.[25] 252년 손권(孫權)이 중병에 걸리자 반황후는 여후가 남편 (고조)의 죽음 이후 한나라를 어떻게 다스렸는지에 대해 손홍(孫弘)에게 물었다.[10] 손권 곁을 계속 간호하느라 스트레스를 받아 그녀 또한 병에 걸렸다. 결국 그녀는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살해당했다.[10]

오나라 관료들은 그녀의 시녀들이 잠든 그녀를 목 졸라 죽였고, 그녀의 죽음은 자연사라고 주장했다.[10] 반황후가 살해된 이유는 《삼국지》에 언급되지 않아 논란으로 남아있다.[10] 《건강실록》에는 시녀들이 중병에 걸린 황제와 황후를 모두 돌보는 것을 꺼려 황후를 살해하여 짐을 덜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0] 또한, 《자치통감》에는 반황후가 시녀들을 학대하여 살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1] 하지만 《자치통감》의 주석가인 호삼성을 포함한 많은 역사가들은 이 주장이 근거가 없으며, 원문의 오해라고 지적했다.[11] 그는 또한 오나라 고위 관료들이 공모했을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손권의 죽음 이후 그녀가 태후가 되어 권력을 장악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11]

그녀의 죽음에 대한 조사 결과 6~7명이 처형되었다.[12] 반황후가 죽자 신하들은 슬퍼하며 그녀를 위한 기도 의식을 거행했다.[12] 손권은 같은 해 곧 사망했다. 반황후는 손권과 함께 장릉(蔣陵; 남경 자금산, 장쑤성)에 묻혔다.[13]

3. 일화 및 평가

중국 역대 왕조 중에서 남편과 나이 차이가 가장 큰 황후라고 불린다.

습유기(拾遺記)》 이 책에서는 그녀는 강동의 절색이라 불리는 천하무이한 미인이다. 직실에 있는 사람은 신녀라고 불리며 외면한다. 이 소문을 들은 손권은 부인의 초상화를 원하자 화가는 초상화를 그려 헌정했다. 손권은 그것을 보고 “이 아이는 확실히 신녀이다. "울음이 이렇게 아름다우니 그래서 하렘에 편입되어 은총을 받았다. 부인은 종종 황제를 모시고 소선대에 갔는데 너무 행복해서 술에 많이 마셨고 그때 루비 반지를 석류 나뭇가지에 걸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그곳에는 유환대라는 높은 건물이 지어 졌다.

질투심이 강하고 황제의 마음을 잘 받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른 첩들을 폄하했다. 또한 《습유기(拾遺記)》에는 "지기신"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총명한 여성으로 여겨진다.

남편은 불교로 개종했다. 자신도 불교에 관심이 생겼다. 무창에 불교 사원인 혜보사를 지었는데, 이는 남조 양 시대에 유명했다.[22]

후세에는 민간에서 신격화되어 석류 꽃의 신으로 모셔졌다.


  • 중국 역대 왕조에서 남편 황제와 가장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황후라고 전해진다.
  • 황제의 정실(추존 황후를 제외한 황후)로서 황제의 생모가 된 사람은 삼국 시대에 반황후뿐이다.
  •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시대의 『백미신영도전』에 따르면, 중국 역대 왕조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미인 백 명에 선정되었다. 대교, 소교, 손부인, 감황후, 등부인(손화의 총희), 채문희와 함께 삼국 시대의 미인으로 꼽힌다.[21] 얌전하고 애수를 띠는 미인이었다고 전해진다(『오잡조』 권8 "반이 수로써 사람을 미혹하다", 『습유기』 권8 "완련통신"). 더욱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 * 세상에 비할 데 없는 미인으로, "강동의 절색"으로 칭송받았다. 처음에는 직실에 들어가, 직실의 사람들에게 "신녀"라고 불리며 꺼려졌다. 이 소문을 들은 손권은 반씨의 초상화를 요구했고, 이에 화가가 초상화를 그려 바쳤다. 애수에 휩싸여 밥을 먹지 못했기에, 가냘프고 연약한 몸이었다고 한다. 손권은 이를 보고 "이 아이는 과연 신녀로다. 비록 수심에 잠겨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기쁜 표정은 말할 것도 없다"고 말하며 아꼈고, 반씨를 부인으로 맞아 총애했다. 손권은 종종 반부인을 데리고 소선대를 행차했다. 반부인은 매우 행복했기에, 술을 많이 마시고 취했다. 그때 루비 반지를 석류 가지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이 고사에서, 그곳에 환류대라는 높은 누각이 세워졌지만, "환류"가 "환류"와 발음이 비슷하여 불길하다고 여겨져, 후에 류환대로 개칭되었다. 어느 날, 손권과 함께 낚시를 하던 중, 반부인은 용양군이 물고기에 눈물을 흘린 고사를 떠올리며 "오늘은 정말 기쁘지만, 앞으로 근심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라는 말을 남겼다. 손권 말년에는 반부인의 예언대로, 비방 중상으로 인해 쫓겨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 낚시터는 동진 시대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 질투심이 강했고, 더불어 황제의 환심을 사는 데 능숙했기에, 처음부터 원부인 등을 비방했다고 한다. 한편 언니와 친했고, 태자를 세울 때 언니를 풀어 시집가게 해달라고 청하여 손권의 허락을 받았다. 또한 『습유기』에는 "지기기신(미세한 실마리를 아는 것, 그것은 신묘한 솜씨라고 해야 할 것이다)"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명한 여성으로 여겨진다.
  • 남편인 손권불교에 귀의했다. 그녀 역시 불교에 대한 흥미를 가졌다. 무창에 불교 사찰인 혜보사를 세웠고, 이는 남조 양 시대에 유명해졌다.[22]
  • 후세에 민간에서 신격화되어 석류꽃의 신으로 모셔졌다.

3. 1. 미모와 관련된 일화

반황후는 중국 역대 왕조 중에서 남편과 나이 차이가 가장 큰 황후로 알려져 있다.[21] 또한 황제의 정실(추존 황후를 제외)로서 황제의 생모가 된 유일한 삼국시대 인물이다.[21]

습유기(拾遺記)》에 따르면, 반황후는 "강동의 절색"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미모를 지녔으며, 직실에 있을 때는 사람들이 "신녀"라고 부르며 꺼릴 정도였다.[21] 이 소문을 들은 손권은 화가에게 반황후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고, 그림을 본 손권은 "이 아이는 과연 신녀로다. 비록 수심에 잠겨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라고 감탄하며 그녀를 총애하였다.[21]

왕휘가 그린 반황후


반황후는 종종 손권을 모시고 소선대에 행차했는데, 너무 행복하여 술에 취해 루비 반지를 석류 나뭇가지에 걸어둔 일화가 있다. 이 일화로 인해 그곳에 유환대라는 높은 건물이 지어졌다.[21]

반황후는 질투심이 강하여 다른 첩들을 폄하하기도 했지만, 《습유기(拾遺記)》에는 "지기신"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총명한 여인으로 여겨지기도 한다.[22]

왕가에 따르면, 반씨와 손권의 또 다른 후궁인 조씨 부인은 똑같이 유명하며, 그들의 아름다움과 재능은 낙수 여신과 요지에 비유된다.[14] 반면 주거는 그녀를 이희에 비유하며, 그녀가 전 황태자를 폐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15]

반황후는 고대 중국의 백미도(百美圖)의 주제로 자주 등장하며, 청나라의 화가 왕휘는 반씨의 인상주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원매는 반씨에 대해 "가련한 소녀의 얼굴은 눈물로 가득 차 있었고, 직조 공장에 갇혔다. 황제를 움직일 수 있었던 마지막 장소는 그림 속 슬픈 표정이었다."라는 시를 남겼다.

손권이 불교에 귀의한 후, 반황후 역시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어 무창에 혜보사를 지었는데, 이 절은 남조 양 시대에 유명해졌다.[22] 후세에는 민간에서 석류꽃의 신으로 모셔지기도 했다.

3. 2. 질투심과 지혜

반황후는 중국 역대 왕조에서 남편 황제와 가장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황후라고 전해진다. 황제의 정실(추존 황후를 제외한 황후)로서 황제의 생모가 된 유일한 사람은 삼국 시대의 반황후이다.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로, 시대의 『백미신영도전』에 따르면, 중국 역대 왕조에서 가장 명성이 높은 미인 백 명에 선정되었다.[21] 대교, 소교, 손부인, 감황후, 등부인(손화의 총희), 채문희와 함께 삼국 시대의 미인으로 꼽힌다.[21] 얌전하고 애수를 띠는 미인이었다고 전해지는(『오잡조』 권8 "반이 수로써 사람을 미혹하다", 『습유기』 권8 "완련통신")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세상에 비할 데 없는 미인으로, "강동의 절색"으로 칭송받았다. 처음에는 직실에 들어가, 직실의 사람들에게 "신녀"라고 불리며 꺼려졌다. 이 소문을 들은 손권은 반씨의 초상화를 요구했고, 이에 화가가 초상화를 그려 바쳤다. 애수에 휩싸여 밥을 먹지 못했기에, 가냘프고 연약한 몸이었다고 한다. 손권은 이를 보고 "이 아이는 과연 신녀로다. 비록 수심에 잠겨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기쁜 표정은 말할 것도 없다"고 말하며 아꼈고, 반씨를 부인으로 맞아 총애했다. 손권은 종종 반부인을 데리고 소선대를 행차했는데, 반부인은 매우 행복했기에 술을 많이 마시고 취했다. 그때 루비 반지를 석류 가지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이 고사에서, 그곳에 환류대라는 높은 누각이 세워졌지만, "환류"가 "환류"와 발음이 비슷하여 불길하다고 여겨져, 후에 류환대로 개칭되었다. 어느 날, 손권과 함께 낚시를 하던 중, 반부인은 용양군이 물고기에 눈물을 흘린 고사를 떠올리며 "오늘은 정말 기쁘지만, 앞으로 근심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라는 말을 남겼다. 손권 말년에는 반부인의 예언대로, 비방 중상으로 인해 쫓겨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 낚시터는 동진 시대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질투심이 강했고, 황제의 환심을 사는 데 능숙했기에, 처음부터 원부인 등을 비방했다고 한다. 한편 언니와 친했고, 태자를 세울 때 언니를 풀어 시집가게 해달라고 청하여 손권의 허락을 받았다. 『습유기』에는 "지기기신(미세한 실마리를 아는 것, 그것은 신묘한 솜씨라고 해야 할 것이다)"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명한 여성으로 여겨진다.

남편인 손권불교에 귀의했다. 그녀 역시 불교에 대한 흥미를 가졌고, 무창에 불교 사찰인 혜보사를 세웠는데, 이는 남조 양 시대에 유명해졌다.[22] 후세에 민간에서 신격화되어 석류꽃의 신으로 모셔졌다.

3. 3. 불교와 신격화

반황후는 남편 손권과 마찬가지로 불교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16] 무창에 회보사(惠寶寺zh-hant)라는 최초의 불교 사찰을 건립하여 불교 보급에 기여했으며, 이 절은 남조 양 시대에 유명해졌다.[16][22]

반황후는 강동의 절색이라 불리는 미인이었다. 직실에 있을 때 신녀라고 불렸으며, 이 소문을 들은 손권은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헌정받았다. 황제는 그림을 보고 신녀라고 칭송하며 후궁으로 들여 총애했다.[21] 반부인은 종종 황제를 모시고 소선대에 갔는데, 술에 취해 루비 반지를 석류 나뭇가지에 걸었고, 이 이야기에 따라 유환대라는 높은 건물이 지어졌다.

질투심이 강했지만, 『습유기(拾遺記)』에는 "지기신"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총명한 여성으로 여겨진다.

후세에는 민간에서 신격화되어 석류꽃의 신으로 모셔졌다.

4. 가족 관계

반황후에게는 방직 공장에 보내진 언니가 한 명 있었다. 250년, 반씨는 손권에게 언니의 노예 신분을 해방시켜 주고 결혼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고, 손권은 이를 승낙했다. 반씨의 언니는 이후 탄소(譚紹)와 결혼했다. 손량이 새로운 황제가 되었을 때, 그는 그의 삼촌을 기병 사령관(騎都尉)으로 임명했다. 손량손준의 박해로 왕자로 강등된 후, 탄소는 관직을 잃고 가족과 함께 고향인 루링으로 돌아갔다.

5.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반씨는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 간략하게 소개되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손권의 셋째 아들인 손량의 어머니로 설정되어 있다.

왕가에 따르면, 반씨와 손권의 또 다른 후궁인 조씨 부인은 똑같이 유명하며, 그들의 아름다움과 재능 때문에 낙수 여신과 요지에 비유된다.[14] 반면에 주거는 그녀를 이희에 비유하며, 그녀가 전 황태자를 폐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고 믿었다.[15]

반씨는 고대 중국의 백미도(百美圖)의 주제로 자주 등장한다. 청나라의 저명한 화가인 왕휘와 오우여루는 반씨의 인상주의 그림을 그렸다. "십유기"에 언급된 반숙이 궁에 초대되는 장면은 매우 인기가 있었다. 원매는 다음과 같이 썼다.

"가련한 소녀의 얼굴은 눈물로 가득 차 있었고, 직조 공장에 갇혔다. 황제를 움직일 수 있었던 마지막 장소는 그림 속 슬픈 표정이었다."

채동번의 소설 『후한연의』에서는 손권이 죄수의 딸인 반씨를 얻었다고 묘사된다. 작고 가냘픈 체형과 온순한 성격으로 인해 손권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고 전해진다. 전공주와 친분을 맺고, 자신의 아들 손량을 황태자로 만들도록 운동했다. 손량이 황태자로 책봉되고, 자신도 황후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황후가 된 후 교만해져 궁녀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암살당했다. 손권은 반황후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며 그녀의 살해에 가담한 궁인들을 처형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붕어했다고 묘사된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三国志』呉志 呉主伝
[21] 서적 『百美新詠』
[22] 서적 『[[仏祖統紀]]』
[23] 서적 건강실록
[24] 서적 삼국지
[25] 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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